묵상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마태복음 22장.

daddy.e.d 2022. 3. 23. 05:19



오늘 본문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 세금을 납부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시험, 사두개인들이 묻는 부활 후의 모습,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까지 정말 하나하나 다 묵상할 포인트가 너무 많은 이야기들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묵상한 것은 9절에서 14절입니다.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9-14)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종들을 보내어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합니다. 왕의 아들이 혼인을 하는데 초대를 받고도 가기 싫어합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청하지만 심지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심지어 남은 자들 중에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입니다. 왕은 분노합니다. 군대를 보냅니다.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잔치가 준비되었는데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으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고 합니다.

그 혼인 잔치는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춘 아주 성대한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종들은 네거리 길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옵니다. 드디어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이윽고 왕이 나옵니다. 어떤 손님들이 왔는지 보러 갑니다. 그런데 반전이 등장합니다. 11절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는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아니 오라고 해서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냐고 묻다니요. 심지어 사환들에게 말해서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왜? 왕은 예복을 입지 않았냐고 물었을까요? 예복은 무엇일까요? 왕의 아들이 결혼하는 자리, 보통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청함을 받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가볼 수 있을까요. 평범한 사람은 평생 엄두도 못 낼 귀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를 청함 받은 자들이 거절하여 네거리에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부릅니다. 부르는 건 누구나 다 공평했지만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다릅니다. 선한 자든 악한 자든 그 자리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잔치를 초대한 왕에 대한 예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먼저는 유대인들이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싫어합니다. 왕의 초대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초대장을 주십니다. 민족이 어떠하든, 출신이 어떠하든, 어떤 형편이든 누구에게나 초대장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바글바글합니다. 그러나, 초대를 받아 잔치에 참여한 이후에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선한 삶을 살았든, 악한 삶을 살았든, 옷이 누추하든, 옷이 비싸든 상관없습니다. 모두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복으로 갈아입지 못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왜 예복으로 갈아입지 않았을까요. 누구에게나 공평한 예복을 입었다면 잔치를 즐겁게 잘 즐길 수 있었을 텐데요.

묵상하면서 든 생각은 아마 어느 정도 신분이 있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어느 정도 재물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존심이 아주 세서 예복 입기를 싫어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 봅니다. 깨달은 것은 잔치에 초대받고 예복을 입지 않은 모습, 그것이 내 모습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국 잔치에 초대받고 준비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내가 살았던 이전의 삶의 모습과 생각과 마음들, 과거가 어떠했든 상관없습니다. 예복을 갈아입기만 하면 잔치를 즐길 수 있는데 왜 여전히 예복을 못 입을까.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있는 내 자아와 습관과 생각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즐기지 못하고 내 방식대로의 삶을 고집하지는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옷을 벗고 아주 희고 눈부신 정결한 예복을 입으면 되는 것인데요, 여전히 잔치를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죄의 습관과 고집스러운 마음들. 참 고쳐지지 않는 내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마련한 소와 살진 짐승, 모든 것이 갖춰진 성대한 잔치. 그 자리에 아무 조건 없이 초대받았습니다. 조건 없이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거저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구나. 내가 은혜를 입었으면 그에 합당한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해야겠다 생각해봅니다. 어제도 퇴근길에 사소한 시비가 있었는데 다른 이를 정죄하는 마음이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구나. 여전히 판단하고 내가 의롭다고 하는 마음을 버리기 싫어하는구나 돌아보았습니다. 여전히 고집스러운 내 의를 내려놓고 오늘 하루 천국의 예복을 입어야겠다. 먼저 청함 받은 사람들을 진멸할 수밖에 없었던 주님의 마음.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청함 받은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안다면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깊이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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