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마태복음 20장.

daddy.e.d 2022. 3. 21. 11:14

 



오늘 본문에는 포도원의 비유가 나옵니다. 제자들의 갈등도 나오고 두 맹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도 나옵니다. 계속해서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 나라와 같이 중요한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욕망과 이를 시기하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오늘 묵상한 것은 1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20:1-16)


마치 탕자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저 녀석은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는데 잔치가 웬 말이냐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의 모습. 오늘 포도원 주인도 일꾼을 부릅니다. 이른 아침에 나가 구합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약속합니다. 제삼시에 나가서 똑같은 품삯으로 일꾼을 구합니다. 제육시, 제구시, 제십일시에도 똑같이 구합니다. 문제는 날이 저물어 품삯을 나눠줄 때 벌어집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과 똑같은 품삯을 줍니다. 이들은 크게 분노하고 불만을 표합니다. 집주인을 원망합니다. 아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이 취급하다니요. 여기저기서 원망이 터져나옵니다. 옳소 옳소! 아마 제십일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엄청 미안하고 민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집주인은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과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입니다. 불합리해 보입니다. 더 일했으니 더 많이 받아야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다. 그것이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의 비유입니다. 이 땅의 비유가 아닙니다. 주님이 셈하시는 날이 옵니다. 삯을 주십니다. 한 데나리온. 주님이 오실 때 우리 모두는 셈을 하게 됩니다. 그때 약속받은 것이 바로 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천국 티켓. 먼저 포도원에 들어와 일했든 나중에 들어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든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 이것이 중요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럴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고 지옥에 갈 사람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회심합니다. 또는 나보다 믿음 생활을 늦게 시작했는데 막 성장하는 사람, 갑자기 톡 튀어나와서 잘했다 칭찬받는 사람을 볼 때, 혹은 그런 비슷한 사례를 볼 때 내 마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바로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부를 때 응답하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일찍 부름 받았든 늦게 부름 받았든 괜찮습니다. 오히려 일찍 부름 받았기 때문에 더 설렁설렁 일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정말 열심히 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약속은 한 데나리온. 오히려 늦게 들어온 사람은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일을 하기에 건강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습니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거나 그만큼 삯에 대한 절실함이 덜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가지 못할 확률이 더 큽니다.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참 많이 허비하고 돌아 돌아 부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포도원은 일꾼으로 채용합니다. 아마 그 사람들은 정말 간절했을 겁니다. 늦게라도 일꾼으로 써 주었으니 더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불러주다니요. 천국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한 데나리온. 과연 내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한 데나리온이 아니라 두 데나리온, 세 데나리온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의 일이었을까? 아니면 죄인을 불러 의인 삼아 주시고 천국 열쇠를 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나라 일이었을까. 늦게라도 함께 천국에 간 것을 기뻐하고 잘 왔다고 안아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마치 나만 갈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를 정죄하고 내 믿음 생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른 아침 부름 받은 일꾼의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아, 모든 것이 은혜다. 이른 아침 부름 받아 주님과 함께 천국을 누렸으면 그 또한 너무 감사한 일이다. 믿음 생활을 통해 계속 부름 받는 일꾼이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은혜구나 묵상합니다.

내가 더 열린 마음이어야겠다. 내 믿음 생활을 돌아보아야겠다. 함께 하지 못하고 부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내 영혼의 눈이 열려 있어야겠다. 내 열심을 자랑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약속받은 한 데나리온, 이것이 내게 최고의 은혜구나 깨달았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 급여 차이는 거의 나지 않았던 부하직원의 급여 내역을 알고 크게 분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약속한 연봉이 그랬습니다. 회사는 능력에 따라 연봉으로 가치를 매겼을 것입니다. 혹은 연봉 협상을 할 때 지혜롭게 잘 하지 못한 내 책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후배의 업무능력과 나이를 판단하면서 크게 분노한 적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래, 약속이 그랬지. 누굴 원망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내 능력을 더 키우고 연봉을 내년에는 더 올려보자라는 선한 마음을 가졌어야 했는데.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회사에 불만을 가지고 결국 퇴사까지 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오늘 본문과는 차이가 있는 경험이지만 내 믿음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게 약속된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리고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내 믿음의 시야를 남에게 두지 말고 내 자신을 더 돌아보고 다듬는 것에 두어야겠다. 죄인 된 모습, 부족한 모습이 보이는 지체들이 있을지라도 판단하지 말자, 주님께서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친구구나, 잘 돌아왔다고 우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자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잘 권면해야겠다 적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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